김지운 <악마를 보았다>
I Saw The Devil(2010)
감독: 김지운
출연: 최민식, 이병헌
평점 8.2
김지운 감독은 한국에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감독이다. 스타일리쉬한 영상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고 껍데기에 비해 내용물은 빈약하다는 이야기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김지운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언제나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인데 기획까지의 과정은 큰 기대를 하게 만들지만 결과물은 언제나 2%가 아쉬웠다.(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의 경우에는 그보다 좀 더 아쉬웠지만)
괜찮았던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부터 <반칙왕>,<장화홍련>,<달콤한 인생>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 시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가 가진 재능들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악마를 보았다>는 우연히 시나리오를 구하게 되어 영화보다 먼저 보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쭉 생각한 것은 ‘과연 이것이 어떻게 영화화 될 수 있을까?’였다. 다른 것이 아니라 영화의 잔인성이 문제였는데 미이케 다케시의 일본 영화 <이치 더 킬러>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그 수준에 범접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인육을 먹거나 기타 등등..
그리고 얼마 후 뉴스를 통해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서 재편집을 반복하고 있다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니 궁금증이 엄청 증폭된 채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가장 좋은 영화이다.
가장 초점이 모아졌던 잔인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다. 심의에 걸려서 삭제되었지만 아마 내 생각에는 삭제되기 전 내용도 상상 했던 것만큼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아쉬운 점이다. 영화가 시나리오만큼의 에너지를 갖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 가지 시나리오와 다른 선택들은 굉장히 탁월했다.
우선 최민식이 연기하고 있는 장경철이라는 인물은 최근 한국 악당계?의 한 흐름이기도 한데(결국 한국사회를 반영한)감정이라고는 한 토막도 없는 극단적 싸이코패쓰다. 그의 욕망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다. 언제나 발기된 채로 욕망을 향해 전력 질주 하는 듯한 인물이다.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없는 악의 전형이다. 이병현이 연기하고 있는 김수현은 능력있는 검사이며 자신의 약혼녀가 장경철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자 검사로써 가질수 있는 정보력을 바탕으로 잔인한 복수를 계획한다.
복수가 애초에 장경철을 제거하는 거라면 문제는 아주 단순하고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끝났을 것이다. 그만큼 김수현이 장경철을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김수현의 계획은 장경철을 제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인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장경철을 잡고 난후 그를 거의 반쯤 죽이고 풀어주고 다시 반쯤 죽이고 풀어주고를 반복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장경철이 되어 장경철을 희생자로 만들고 죄의식과 공포를 끌어내려 한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한순간이지만 정식적 고통 정식적 승리를 영원한 것이기에 하지만 그는 결코 장경철이 될 수 없었고 장경철은 여전히 장경철일 뿐이다. 결국 그 판단착오로 인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게 되고 장경철은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프로이트가 말한 죄의식의 내용 중에 악인은 죄인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역설적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에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평생을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는 내내 죄의식에 시달린다. 김수현은 마지막으로 장경철을 묶어두고 물어본다. “이제 알겠어? 니가 한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고..” 하지만 장경철은 자신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연기하는 것도 포기하고 본질을 드러낸다. 자신은 고통도 죄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장경철을 제거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고 만다. 그는 그를 죽였지만 그 무엇도 빼앗지 못했다. 복수의 불가능성 앞에 그는 절망하고 무너진다. 그것은 또 한국사회가 마주한 절망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 작가는 박훈정씨인데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와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이다. 김지운감독도 그렇고 류승완감독도 그렇고 좋은 시나리오를 들고 있으면 꽤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연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박훈정씨의 시나리오를 통해 증명해 주었다. 아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두 감독은 매번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것 보다는 간간히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일수도 있다.